영국 기후변화법의 국내 시사점

영국-한국 기후변화 비교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에 근거해 설립된 녹색성장위원회가 여러 정부를 거치는 동안 점차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영국 기후변화법의 이행현황 및 국내적 시사점’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같이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선도적인 탄소 감축 목표를 제시하며 2021년 2월 유엔 안보리 토론회, 6월 G7 정상회의, 12월 제26차 기후변화 당사국총회(COP26)를 주도하는 등 적극적인 기후외교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이에 비해 과거 선도적인 기후정책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우리나라는 국내외에서 감축 목표 상향 압력 속에 2021년 P4G(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 서울 정상회의(2021.05.30.∼31)를 개최했다.

사실 영국은 2008년 기후변화법(Climate Change Act 2008, 이하 기후변화법)을 제정하고, 한국은 2010년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을 마련해 양국 간의 초기 대응 입법의 시기와 방법은 유사했다. 하지만 10여 년 후의 성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영국의 기후변화법은 기후변화 감축과 적응을 모두 규율하고 있다.

또 영국과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의 단계, 주요 산업의 구조, 에너지 정책 등에 있어 다른 점이 많아 두 나라의 기후변화 정책을 단순히 비교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온실가스 감축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탈석탄 정책은 길게 볼 때 공공산업을 민영화했던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에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어, 후발 산업국인 한국의 탈석탄 정책과는 역사적 맥락이 다를 수 있다.

탄소시대 이끌던 영국, 탈탄소 시대도 이끌어

그런데도 보고서는 영국의 기후변화법이 기후변화정책을 이행하는 데 있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중심으로 비교법적 의의를 도출해보고자 했다. 산업혁명으로 탄소시대를 열었던 영국은 탈탄소시대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영국 의회는 2008년 제정된 기후변화법에서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26%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축하고, 2050년까지 1990년 대비 최소 80% 감축하는 목표를 제시했다. 2008년에 기후변화법을 제정한 것은 실정법에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명문화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2019년 6월 영국 의회는 2050년 탄소 감축 목표를 1990년 대비 최소 100% 강화하는 내용으로 기후변화법을 개정했는데, 탄소 중립목표를 법정화한 것도 주요 선진국 중 최초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은 기후변화법이 제정된 2008년 이후 경제성장과 탄소 감축을 동시에 달성하는 ‘탈동조화(decoupling)’ 성과를 내고 있다. 게다가 영토 내 온실가스 배출만 감소한 것이 아니라 소비 관련 온실가스 배출도 같이 감축하고 있어, 실질적인 탈탄소사회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영국은 2050년 장기 탄소 감축 목표를 1990년도 대비 최소 80%에서 100%로 높였을 뿐만 아니라, 중기 목표도 지속해서 상향하고 있다. 2020년 12월 유엔에 제출한 감축 목표에서도 기존의 1990년도 대비 2030년 57% 탄소 감축 목표를 68%로 상향한 바 있고, 2021년 4월 미국이 주최한 기후정상회의 직전 2035년까지 1990년 대비 78% 감축하는 추가 목표를 제시했다.

단계별 탄소 감축 목표의 법정화

기후변화법은 2050년 탄소 감축 목표뿐만 아니라 이를 이행하기 위해 정부가 5년 단위의 배출 상한, 이른바 탄소예산(Carbon Budget) 이행에 필요한 계획을 수립토록 하고 있다. 영국의 탄소예산은 통상적인 의미의 예산이 아니라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한 탄소배출 총량을 예산개념으로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은 탄소예산을 1년 단위가 아닌 5년 단위로 산정함으로써 한파, 폭염 등 단기적인 기상이변과 같은 변수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이행에 유연성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 탄소예산은 계획실행 12년 전에 미리 결정된다는 특징이 있다.

탄소예산을 12년 전에 정해 정부기업 등에게 충분히 대응한 시간을 주고, 관련 투자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며, 탄소예산 수립에 있어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탄소예산의 이행현황을 살펴보면 고든 브라운 총리(노동당),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보수당), 테레사 메이 총리(보수당), 보리스 존슨 총리(보수당)로 이어지는 정권의 변화 속에도 제1차 탄소예산(2008∼2012년)과 제2차 탄소예산(2013∼2017년)은 목표를 초과 달성했고, 제3차 탄소예산(2018∼2022년)의 목표는 성공적으로 이행 중이다.

제4차 탄소예산(2023∼2027년)과 제5차 탄소예산(2028∼2032년)은 12년 전 확정 원칙에 따라 각 2011년과 2016년에 확정됐다. 제6차 탄소예산(2033∼2037년)은 2021년 4월 영국 비즈니스에너지산업전략부가 상하원에 제출한 2021년 탄소예산명령(Carbon Budget Order 2021) 초안을 바탕으로 논의 중이며, 2021년 6월 이전 확정될 예정이다.

기후변화위원회의 독립성 보장

이혜경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보고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영국 기후변화법의 또 다른 특징은 기후변회위원회라는 정부 자문 조직의 설립과 독립적 운영을 보장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점이다”라고 전했다. 기후변화위원회는 적응위원회 그리고 사무국 등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기후변화위원회와 적응위원회는 각각 5∼8명 내외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위원은 4∼5년 임기(1년 연임 가능)로 일한다. 또한 기후변화위원회와 적응위원회 모두 참여하는 위원을 두어 양 위원회 간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기후변화위원회 위원들은 전문성에 기반해 선임되고, 업무상 독립성을 가지지만, 선임과 예산의 집행에 있어 정부 및 국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예를 들어 최근 기후변화위원회 의장은 에너지기후변화부장관의 추천으로 하원의 에너지기후변화위원회의 청문회를 거쳐 임명된 바 있다.

그리고 기후변화위원회의 예산은 연간 약 57억 원 정도로 충분히 지원되며, 내부의 감사위원회를 두고 자체 운영되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위원회 위원 중 1명이 사무국장을 맡아 30여명의 상근 전문가로 구성된 사무국을 활용하고 있으며, 필요하면 외부 전문가 자문도 받고 있다.

장기 탄소 감축 목표 설정 핵심적 역할

영국 기후변화위원회의 역할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째, 장기 탄소 감축 목표설정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8년 11월 영국 정부에 2050년까지 탄소 중립목표의 설정 및 이행이 필요함을 제안한 바 있다.

영국 정부가 국제 탄소 시장의 활용 등에 있어서 기후변화위원회의 권고사항을 전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 정부가 기후변화위원회의 권고를 반영한 탄소 중립 개정안을 2019년 6월 의회에 제출하고, 2019년 탄소 중립 개정안이 발효되기까지 신속한 과정을 거칠 수 있었던 것은 기후변화위원회의 자문을 중심으로 개정 논의가 이뤄진 것이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5년 단위 탄소예산의 결정에서도 기후변화위원회의 역할이 크다. 정부는 탄소예산을 정함에 있어서 기후변화위원회의 자문을 고려해야 하고, 최종 목표가 기후변화위원회의 자문과 다를 경우 타당성 있는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기후변화법이 기후변화위원회의 탄소예산 자문을 정부가 수용하도록 하고 있진 않지만, 역대 정권에서 기후변화위원회의 탄소예산 자문은 사실상 대부분 수용됐다.

셋째, 정부의 감축 이행 모니터링에 있어서도 기후변화위원회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기후변화위원회의 분석 내용이 투명하게 공개되도록 하고, 기후변화위원회가 감축 진행 상황에 대해 의회에 보고하면 정부가 관련 입장을 의회에 제출하도록 하는 등 기후변화위원회의 자문이 기후변화 정책과 입법에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마련되어 있다. 그 결과 기후변화위원회는 정책 결정 및 입법 권한이 없는 자문기구이지만, 정부와 국회를 향해 사실상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 장기 탄소 감축 목표의 법정화 필요

우리나라는 2010년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을 제정했지만 탄소 감축 목표를 시행령에 위임했고, 정권의 변화에 따라 개정이 이뤄져 왔다. 그러나 산출량 방식을 온실가스 배출전망치에서 절대량 방식으로 변경한 것 이외에 실질적인 목표 상향의 진전을 이뤄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향후 국회는 2050 탄소 중립목표와 정부가 올해 내 상향 제시를 약속한 2030 탄소 감축 목표 등을 법에 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국회는 정부가 2050 탄소 중립목표에 따른 중단기 탄소 감축 목표를 수립하면서 적어도 10년 전에 국회 검토를 거쳐 확정하도록 하고, 탄소 감축 이행현황을 주기적으로 국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등의 방식으로 기후변화정책이 정치적 중립성을 가지고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장치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중복 기구의 효율성전문성 강화 필요

녹색성장위원회는 2008년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 제정 당시 기후변화대응 정책을 통합조정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는 조직으로 대통령 소속으로 설립됐다. 이후 박근혜 정부 하에서 녹색성장위원회는 국무총리 소속으로 변경됐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법정기구인 녹색성장위원회가 존재하지만, 2019년 4월 대통령 소속으로 국가기후환경회의가 설립됐고, 2020년 말 유엔에 중장기 감축 목표를 제출할 때에는 법정조직이 아닌 저탄소사회비전포럼의 의견을 수렴하는 형식을 취했다.

2021년 4월 국무회의는 국가기후환경회의를 폐지하고 대통령 소속의 2050 탄소중립위원회 설립을 의결했다. 정부는 지속가능발전위원회녹색성장위원회국가기후환경회의미세먼지특별대책위원회의 기능을 합치는 방식의 탄소중립위원회의 설립을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국회는 법정기구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녹색성장위원회, 미세먼지특별대책위원회와 2021년 5월29일 출범한 탄소중립위원회의 중립과 비효율을 최소화하기 위한 관련 법률안들을 신속히 검토해야 할 것”이라며 “나아가 한국의 행정조직체계에서 영국의 기후변화위원회와 같은 독립성을 가지는 자문기구의 설치운영이 어렵다면, 전문가의 의견수렴 절차를 강화하는 대안도 함께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국회=조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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